몰래둔 바둑

글쓴이: 아홉그루   
글쓴곳: 달 팽 이 | 2008/11/29 23:54

무슨 일이든 몰래하는 짓이 가장 재미있다. 보지 말라는 것 보는 재미, 하지 말라는 일 하기, 먹지 말라는 것 먹기, 등등......,

그 중에서 바둑이란 게 있다. 일해야 될 시간에 몰래 바둑 두는 것도 재미로 치자면 장난이 아니다. 우리 집에서는 할머니께서 손주들 바둑 두는 걸 극히 싫어하셨다.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싫어하셨다기 보다는 별 소득도 없는 바둑이나 두고 있는 게 싫으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할머니 몰래 장소 옮겨가며 두던 바둑이 왜 그리 재미있던지......,

한동안 바둑을 잊고 있다가 시간 여유가 되니 바둑을 두게 되었다. 물론 바둑판을 앞에 놓고 둘 사람은 별로 없지만 인터넷이란 게 있어 가끔 두게 되었다. 컴퓨터로 바둑을 두게 되니까 접근성에 있어서 아주 편리하게 되었다. 처음엔 엄격히 기준을 세워 점심시간만 간단히 한두 판 두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느슨해져간다. 한 판만 더 두고 그러다 일할 시간에까지 두게 된다. 그러다 눈총을 받고서는 안 두게 되지만 또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져 가곤 한다.

예전에 일할 시간에 바둑을 두었다. 점심시간부터 둔 바둑이다. 첫 판에 내가 불계승을 했다. 상대가 한 번 더 두자고 한다. 두 번째 판은 내가 3.5집을 졌다. 내용으론 내가 다 이긴 판인데 끝내기에 욕심을 내다 넉 점이 상대에게 들어가는 바람에 역전패를 당했다. 열이 확 오른다. 나 같은 아마추어는 이게 실력인데 이걸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열을 받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 일대일이니 결승전을 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승부욕이 일어난다. 한 번 더 두게 되었다. 중반전으로 접어들었는데 살얼음판을 걷는 정도로 형세가 만만찮다.

이때 전화가 울린다. 받으니 여보야 목소리가 들린다. 말을 하게 만드는 전화다. 정신이 온통 바둑에 가 있는데 건성으로 전화를 응응 하면서 받으니 여보야는 내가 딴짓을 하는 걸 눈치 챘다. 불쾌한 마음으로 전화를 툭 하고 끊는다. 이미 20초 초읽기에 돌입한 상태다. 전화를 거니 안 받는다. 그러고 있는데 선배가 들어온다. 화불단행이란 게 맞다.  지난번 작업했던 곳에서 이런 일이 생겼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으신다. 창을 급히 내린다. 마음이 탄다. 지금 초읽기 하고 있고 20초 초읽기 3회니 일 분만 경과하면 시간패를 당한다. 급한 마음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메시지 들어오는 소리가 난다.  열어봐야 하나 마나 갈등이 인다. 이삼 초 정도 갈등이 일어난다. 열어보니 여보야가 보낸 것이다. 어떻게 서방님이랑 통화하면서 딴짓을 할 수 있느냐는 내용이다. 이런 낭패가 어디 있나..

그때 선배가 무슨 일이 생겼는지 급히 나가신다. 기분이 금세 좋아진다.  얼른 창을 여니 다행히 마지막 초읽기를 하고 있다.  금상첨화란 단어가 떠오른다. 새옹지마랬지.   한 수 급하게 놓고 전화기에 손을 댔다. 역시 안 받는다. 에라 모르겠다. 바둑이나 열심히 두자. 이렇게 한 수 한 수 놓으니 금방 전에 일은 까마득 잊어버렸다. 형세판단기를 눌러보니 2집반 정도 유리하다. 별 탈 없이 끝내면 승리는 내 것이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한 수씩 놓아가는데 웬걸 여보야한테서 다시 전화가 온다. 좀 전에 일이 억울했던지 다시 말을 막 시킨다. 초읽기를 한다. 혼미한 가운데서도 마음은 바둑판에 가 있다. 마지막 18초, 19초 하는데  순간  마우스가 말을 안 듣는다. 시간패하셨습니다  하는 친절한 자막이 뜬다. 그렇게 온갖 역경을 헤처가며 승리를 눈앞에 두었는데 이렇게  끝나다니......,

몰래한 잔치였지만 잔치는 끝나고 설거지가 남았다. 여보야가 하는 말이 보통이 아니다. 서방님이랑 통화하면서 딴짓하기 있나 하고 따진다. 그러면서 자기도 앞으로 나처럼 똑 같은 행동으로 답해 줄게, 하면서 사설을 늘어놓는다. 바둑 지고 남자친구한테 사설 듣고 선배 눈치 보이고 신세가 말이 아니다. 거의 다 이긴 바둑 진 것만도 짜증이 나는데 곤욕까지 당했다고 생각하니 기가 찬다. 처음부터 내가 일할시간에 몰래 바둑 둔 것이 이런 단초를 제공했으니 어디 화풀이 할 것도 없다. 내 잘못인 것을.

하지 말라는 짓을 그래도 한다. 어제도 몰래 바둑을 두었다. 물론 여보야 전화도 없었고 선배눈치도 없었다. 그런데 뭐라고 할까 짜릿한 즐거움 같은 거는 없다. 화나고 짜증나고 사설 얻어먹는 그런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이랄 수도 있긴 있나보다.

2008/11/29 23:54 2008/11/29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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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바나나 2008/11/30 23:45 댓글 수정/삭제

      전화하면 바쁘다고 하면서 막 끊고 그러더만 바둑 두고 있었군!!
      더구나 내가 그리 끊었는디도 다시 전화하긴 커녕 홀가분 하게 계속 뒀단 말이지!!
      이제 모든 것을 알아버렸으니 앞으론 짤 없을 줄 알아. 글고 두는 족족 져라~ 췌!!

      빨리 바둑 갈켜주란 말이야. 진작 갈켜줬으면 그리 몰래 안 두고 서방님이랑 같이 두고 있었을 거 아녀. 1년 안에 이겨주마!!!

        아홉그루 2008/12/01 22:49 수정/삭제

        벌써 며칠 째 시달리고 있는 아홉그루!
        "그랬단 말이지? 서방님이 전화하는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바둑을 둬?
        두고봐라 똑같이 갚아줄테니."

        바둑 절대로~ 배우지마!

        너바나나 2008/12/01 22:55 수정/삭제

        그게 무신!!
        진짜로 시달리는 것이 뭔지 갈켜줄까!!!
        앞으로 1년동안 날마다 1시간씩 바둑 갈켜주길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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